도처에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진부한 권유를 종종 듣습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부터 SNS의 짧은 문구들까지,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치유의 시작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이 권태로운 조언을 들으며 그저 좋은 말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건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아닌, 꼴 보기 싫은 '나'입니다.
짝짝이 눈, 짧은 다리, 옷 위로 삐져나온 살찐 허리 같은 외형적 조건은 오히려 약과일지 모릅니다. 정작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내면의 그림자들이니까요. 중요한 순간마다 어김없이 고개를 드는 무능력감, 어딜 가나 겉도는 듯한 부적절감, 늘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심약함은 도대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낮에 했던 말 한마디를 밤새 곱씹으며 '이불킥'을 하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이 옹졸한 자아를 어떻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학대받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짊어지고 사는 나, 열등감에 주눅 들어 타인 앞에 떳떳치 못한 나, 누군가 작은 쓴소리를 나를 향한 비난으로 여기며 이빨을 드러내는 자격지심 만랩의 나... 이런 '나'를 사랑하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고문인 것 같습니다.
융이 '두렵다'고 표현한 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쉬운 일이었다면, 그는 굳이 '두렵다'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몇 마디 수사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인류는 이다지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겁니다. 두렵다는 말은,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인지를 정직하게 인정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 민낯이 너무나도 깊고 오랜 수치였기 때문입니다. 심약한 나, 상처받은 나, 여전히 두려운 나를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그래서 외면하고, 포장하고, 더 나은 버전의 나를 만들어 그 앞에 세워둡니다.
융은 분명 그 두려움을 넘어가는 길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이런 말을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받아들임'이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피해의식에 절어있고, 주눅 들어 있으며, 신경을 곤두세운 채 피곤하게 살아가는 나에 대해 사랑스러운 느낌을 가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이것 또한 지금의 나임을 부정하지 않는 것, 수치스러운 기억도, 여전히 떨리는 마음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자격지심도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는 것, 그 인정이 치유의 첫 번째 문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두렵습니다.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융의 말은 그 두려움 앞에서 도망치지 말자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두려운 그 마음 속에 오랫동안 피해온 진실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오늘 하루, 두려워하는 내 곁에서 나를 그저 묵묵히 또 따스하게 살펴봐 주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