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이 남긴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삶의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다니,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인가? 그런데 멈추어 생각해 보니 이상하게도 위로와 함께 새로운 해법을 알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막막한 벽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 불공평한 운명의 굴레,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부모님의 삶의 방식, 혹은 자신의 뿌리 깊은 결함 같은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합니다.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으며, 밤을 지새우며 스스로를 들볶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문제는 더 단단해지고, 우리는 그 속으로 점점 깊이 갇혀버리곤 합니다.
융은 이 막막한 지점에서 뜻밖의 위로와 해법을 건넵니다. "삶의 가장 크고 중요한 난제들은 풀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 난제보다 더 커져야 한다.“
융의 이 통찰은 우리가 평소 가진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박은 우리의 시야를 그 문제의 테두리 안에만 고착시킵니다. 온 신경이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에만 쏠려 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그 문제의 크기만큼 축소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다 오히려 그 문제 안에서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융이 말한 ‘Outgrow’란 무엇일까요. 우리말로 옮기기 까다로운 표현입니다. '극복하다'도 아니고, '잊다'도 아니고, '해결하다'는 더더욱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작아진 옷을 자연스럽게 벗어 던지듯, 나의 존재 자체가 확장되어 예전의 고민이 더 이상 나를 구속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가장 가까운 번역은 아마 '그것보다 커지다'일 것입니다. 신발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 발이 자란 것입니다.
융에 따르면 치유와 성장은 문제를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보다 더 큰 존재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자아가 문제에 매몰되어 해결책만 찾고 있을 때, 우리 정신의 전체성인 '자기(Self)'는 그 문제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는 더 넓은 시야와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이전의 좁았던 자아의 틀이 깨지고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는 이 과정, 즉 개성화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문제보다 더 큰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도피와 다릅니다. 도피는 문제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고, ‘Outgrow’는 문제를 안은 채로 다른 방향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 그 문제 말고도 살아야 할 삶이, 만나야 할 사람이, 겪어야 할 경험이 쌓이다 보면 어느 날 돌아보니 그 문제가 예전만큼 크지 않습니다. 문제가 작아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란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아본 옥스퍼드 영한사전은 ‘Outgrow’의 세 번째 뜻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을 그만두다, 그것에 흥미를 잃다."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나이가 성숙해야 그렇게 되겠지요. 진정한 치유란 집요하게 매달렸던 그 고통스러운 문제에 대해 마침내 건강하게 흥미를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조금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그 문제를 당장 풀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곳에서 살아도 되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되고, 낯선 길을 걸어도 됩니다.
삶의 다른 구역에서 존재를 넓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의미의 문제 풀기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문제 밖으로 나와 더 큰 사람이 되어버렸기에, 예전의 그 좁았던 감옥 속으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 해결되지 않은 채 안고 사는 것. 그러면서 조금씩 커지는 것. 융은 그것을 성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신에게 힘과 용기를 줍시다. 삶의 새로운 영역으로 한 발짝을 디밀 수 있는 찰나의 용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