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놀랍지 않나요? 복지도 좋고, 경치도 좋고, 환경도 좋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이리도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한편, 경제난과 부정부패 추문에 휩싸인 남미 국가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훨씬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동유럽 국가의 행복지수는 괄목할 상승도를 보였고요.
한국의 전체 행복지수는 어땠을까요? 남미 국가들이나 동유럽은 물론이고 대만, 싱가포르, 베트남보다도 훨씬 낮은 67위에 올랐습니다. 25세 이하 청년들의 행복도는 물론 국가 전체보다 더 낮습니다.
자료를 여러 차례 읽고, AI를 통해 교차 확인하며 원인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결국 해답은 경제 성장이나 정치적 안정보다 ‘관계’와 ‘지지 체계’에 있었습니다. 수만의 외국 관객을 유치한 BTS가 광화문을 무대로 삼아 아리랑을 떼창하는 것을 보며 ‘국뽕’에 만취할 때, 고립되고 불안한 청년들에게는 오히려 박탈감과 소외감만 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도 문화도 윤택해지고 있지만, 관계는 군색하고 빈한합니다. 무너져도 지지해 줄 버팀목이 없고, 실패하면 그것으로 나락입니다. 그러니 행복은 희박하고, 나머지는 온통 슬픔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 융의 오늘 잠언은 어떻게 힘을 발할 수 있을까요?
융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균형 운동으로 보았습니다. 기쁨이 한쪽 끝이라면, 슬픔은 다른 쪽 끝이 아니라 그 기쁨을 지탱하는 바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문제는 슬픔이 많아서가 아니라, 슬픔이 제자리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슬픔이 관계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실패하면 위로받았고, 상실을 겪으면 함께 견뎌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슬픔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삶의 일부였고, 그렇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에게 슬픔은 고립된 감정으로 경험됩니다. 그것은 누구와도 충분히 나눠지지 못한 채,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습니다. 실패는 서사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로 끝나며, 좌절은 해석되지 못한 채 자기 비난으로 굳어집니다. 이때 슬픔은 더 이상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균형추가 아니라,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무게가 됩니다. 융의 말이 힘을 잃는 순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슬픔이 ‘균형’이 아니라 ‘고립’이 될 때, 행복 역시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더 많은 성공이나 더 나은 조건 이전에, 감정을 견딜 수 있는 구조, 다시 말해 슬픔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되찾는 일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실패가 끝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되고, 불안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다루어질 수 있는 경험이 될 때, 슬픔은 다시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행복도 현실적인 감각으로 돌아옵니다.
남미의 젊은이들이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단순히 낙천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에도 참여합니다. 동유럽의 상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조건이 완벽해져서라기보다, 변화의 속에서 서로를 붙들어 주는 경험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복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함께 버텨내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결국 융의 문장은 이렇게 다시 읽힐 수 있습니다. 행복이 의미를 가지려면 슬픔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슬픔이 머물 수 있는 관계와 구조가 있을 때만 행복이 성립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청년들이 겪는 불행은 슬픔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슬픔을 지탱해 줄 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에 더 깊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더 행복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슬퍼할 수 있을 것인가”일 것입니다. 서로의 실패를 견디게 해 주는 관계, 무너짐을 끝으로 만들지 않는 사회, 감정이 흘러갈 수 있는 통로를 다시 만드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현실적인 치유의 방식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