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신의 경험에 대한 방어’라는 말은 얼핏 종교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종교가 어떻게 타락하고 인간을 오염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잠언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은 신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신을 두려워합니다. 신을 만나는 일은 자기 욕망과 폭력성, 자기기만과 오만을 내려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종종 신을 직접 경험하기보다, 신의 이름을 부르는 제도와 형식과 권위 뒤로 숨습니다.
종교의 의식과 교리와 공동체는 본래 인간을 신성에 가까이 데려가기 위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그릇이 본질보다 중요해지면, 종교는 오히려 신을 피하는 장치가 됩니다. 기도는 성찰이 아니라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주문이 되고, 교리는 진리를 향한 길이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는 판결문이 되며, 신의 이름은 인간의 폭력과 탐욕을 정당화하는 변명이 됩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렇게 형식이 본질을 몰아내는 일은 너무 자주 벌어집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이 불안과 경쟁심으로 변질되면 아이를 ‘의자 뺏기’ 게임으로 끝없이 밀어 넣습니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명분이 오히려 아이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잘살기 위해 돈을 벌지만, 돈을 버는 과정이 삶 전체를 삼켜버리면 정작 잘사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건강해지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몸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정작 자신의 몸을 대상화해 버립니다. 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 상담에 오지만, 때로는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담실 의자에 앉아만 있는 채, 정작 변화를 위한 발걸음은 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가 신의 경험에 대한 방어가 될 수 있듯이, 사랑도 사랑의 경험에 대한 방어가 될 수 있고, 교육도 성장의 경험에 대한 방어가 될 수 있으며, 성공도 삶의 경험에 대한 방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이름을 붙인 채로 본질을 피할 수 있습니다. 좋은 부모, 좋은 신자, 좋은 시민, 성공한 사람, 성실한 사람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정작 살아 있는 자기 자신과 만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의례도 필요하고, 제도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교육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그 형식이 생명을 살리고 있는지 아니면 생명을 질식시키고 있는지, 나를 위해 하고 있다는 이 일과 행동이 정말 나를 살리고 있는지 나를 더 피폐하게 만드는지, 내가 하는 일이 사랑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불안을 달래기 위한 통제인지 물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내가 믿는 신 앞에 섰을 때 나는 더 겸손하고 자유로운지 아니면 더 완고하고 배타적으로 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신의 경험은 꼭 종교적 언어로만 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슬픔 속에서 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의 고통 앞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와 상실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피하던 자기 마음을 마주하는 순간에 옵니다. 그때 인간은 압니다. 내가 만든 계획과 명분과 형식보다 더 큰 삶이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앞에서 조금 낮아질 때, 우리는 비로소 덜 어리석어집니다.
어쩌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드리는 기도는 상실과 슬픔, 실패와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도 자신을 가장 겸손하고 가난한 자리로 데려가는 행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