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은 카를 융이 BBC와 인터뷰에서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답한 말입니다. 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삶의 여러 영역에도 이 말은 해당됩니다.
부모들은 종종 아이가 책상 앞에 앉아 있거나 학원에 갈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는 너 믿는다.” 얼핏 따뜻한 말처럼 들립니다. 아이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아이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내 기대에 맞는 결과를 가져와라!”
정말로 아이를 믿는다면 이런 뜻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네가 열심히 하든 못 하든, 성적이 오르든 떨어지든, 실패하든 헤매든,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네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나와 너의 관계는 성적표 하나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너의 존재가 결과보다 크다는 사실을 안다고. 그렇게 너와 나는 서로를 신뢰한다고. 그러나 많은 부모의 “믿는다”는 말을 번역해 보면 종종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의 뜻을 가집니다.
바람둥이가 연인에게 “오빠 믿지?”라고 말할 때도 비슷합니다. 그 말은 믿을 만한 이유를 제공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하지 말라는 요구에 가깝습니다. 현실을 보지 말고, 불안을 말하지 말고, 내 말에 순응하라는 압박입니다. 이때 믿음은 관계를 깊게 하는 신뢰가 아니라, 질문을 중단시키는 기술이 됩니다.
융은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오만한 확신의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현실을 가리고, 지식과 경험을 대신하며, 마음의 불안을 덮는 데 사용되는지를 꿰뚫어 본 말에 가깝습니다. 어떤 것을 안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컵을 손에 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반대로 무엇인가를 자꾸 믿어야만 한다면, 그곳에는 아직 충분히 보지 못한 현실, 견디기 어려운 불안, 확인되지 않은 욕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때로 숭고한 말입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믿음은 가끔 망상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는다는 말로 사실을 피합니다.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해”라고 믿으며 반복되는 모욕을 견딥니다. “우리 아이는 괜찮아질 거야”라고 믿으며 아이의 고통을 보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부모야”라고 믿으며 아이에게 가한 압박을 성찰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때로 신에 대한 숭앙이 아니라, 현실을 망각하려는 정신적 몸부림입니다.
진짜 신뢰는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신뢰는 현실을 견딜 수 있을 때 생깁니다.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 현실, 연인이 불안을 느끼는 현실, 내가 기대와 욕망으로 누군가를 조종하고 싶어 하는 현실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이라는 말을 덜 함부로 쓰게 됩니다.
믿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음이 현실을 은폐하게 되면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됩니다. 융의 말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믿음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종종 사용한다면 그 뒤에 혹시 숨겨 둔 불안과 욕망이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