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남다른 헤어스타일, 아무도 입지 않는 옷, 무리와 다른 의견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 우리는 흔히 개성을 눈에 띄는 것, 삐져나온 것, 남과 구별되는 특이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융이 평생에 걸쳐 말하려 했던 개성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흑과 백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 색은 극단적입니다. 흑은 철저히 흑이고, 백은 철저히 백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개성일까요? 흑과 백을 합하면 회색이 됩니다. 회색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삐져나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둘 다를 품은 고요함이 있습니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는 회색이 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Individuation이라는 단어를 해자解字해 보겠습니다. In과 division으로 나뉩니다. division은 나눈다는 뜻이고, In은 그것을 뒤집는 접두사입니다. possible이 impossible이 되고, visible이 invisible이 되듯. Individuation은 결국 나눌 수 없음, 분리 불가능함입니다.
무엇을 나눌 수 없게 됩니까? 융은 인간 안에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세상에 보여주는 페르소나Persona와, 자신도 인정하기 싫은 내면의 그림자, 외향성과 내향성, 감각과 논리, 원칙과 유연성. 대부분의 사람은 한쪽을 택한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쪽을 택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자신이 택하지 않은 그 항목들이 활성화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훼방 놓습니다. 무의식적으로요.
개성화는 이 싸움을 한쪽의 승리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두 극단이 서로를 알아보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나뉘지 않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통합이 일어날 때 삶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만성적인 내적 갈등입니다. 이쪽이 옳은가 저쪽이 옳은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 저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 그 소모적인 내전이 멈춥니다.
융은 말합니다. 개성화는 세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하는 것이라고. 내 안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어두운 면을 견디지 못합니다. 내 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약함에 냉혹합니다. 내 안의 모순을 통합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의 모순 앞에서 분노하거나 무너집니다.
반대로 자신 안의 그림자와 화해한 사람은 타인의 그림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흑과 백을 모두 품은 사람은 세상의 흑과 백도 품을 수 있습니다. 포용해야 할 세상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낯선, 불편한, 미숙한, 친해지기 어려운 자기 자신입니다.
개성화는 특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회색이 흑도 백도 아닌 것처럼, 온전해진 사람은 어느 극단도 아닙니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흑이나 백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의 목적지는 바로 거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