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유난히 반복되는 불운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늘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가 똑같은 이유로 상처받으며 헤어지고, 직장을 옮겨도 이전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인간관계의 갈등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 “이게 내 팔자지”, 혹은 “참 운명이 가혹하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분석심리학의 거장 카를 융은 우리의 이런 체념을 향해 날카롭고도 따뜻한 일침을 놓습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믿었던 그 거대한 힘의 실체는 사실 외부의 우주적 장난이 아니라, 내 안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마음을 거대한 빙산에 비유하곤 합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나’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거대한 본체는 차가운 바다 아래 잠겨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심연이 바로 무의식입니다. 우리가 이 심연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바다 아래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빙산이 흘러갈 방향을 결정하듯, 무의식은 우리의 선택과 감정, 행동을 조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두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일상의 소소한 예시를 들어볼까요? 누군가에게 작은 조언만 들어도 공격받는다고 느끼며 과하게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늘 “세상 사람들은 나를 무시해. 어딜 가나 그런 사람뿐이야”라며 자신의 인복을 탓합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 엄격한 환경에서 형성된 ‘열등감’이나 ‘부족한 존재가 될 것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이 무의식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방치되면, 그는 자신을 돕고 싶어 하는 타인의 호의조차 비난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 스스로 주변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들면서, 정작 본인은 그것을 ‘외로운 운명’이라 여기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끌린다면, 그것은 나의 취향이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자기 부정의 각본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각본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독이 되는 관계를 전전하며 “나는 왜 늘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라고 자책하게 됩니다.
융이 제안하는 치유의 시작은 ‘의식화(Making conscious)’입니다. 이는 거창한 수행이 아닙니다. 내가 왜 특정한 상황에서 이토록 화가 나는지, 왜 특정한 사람에게 이토록 집착하는지, 그 불편한 감정의 꼬리를 잡고 내 안의 심연을 잠시 비추어 보는 일입니다. “아, 내 안에 사랑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여전히 울고 있었구나”, “내 안의 자존심이 사실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 무의식의 지배력은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은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외면해 왔던 나의 초라하고 어두운 면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 촛불을 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삶의 운전대’를 되찾게 됩니다. 더 이상 무의식에 등 뒤를 떠밀려 원치 않는 곳으로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경로를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자꾸만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패턴이 있다면, 이제는 하늘을 원망하기보다 내 마음의 바다 아래를 살며시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당신의 삶을 제멋대로 휘두르기 전에, 그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손을 내미십시오. 그때 비로소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추고, 당신만의 진정한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해 동안 잘 살아 남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