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서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서 먼저 바꿔야 할 대상은 아닌지 살펴보라는 권고입니다. 이 말은 부모로서의 태도를 꾸짖는 훈계가 아니라, 아이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그 무언가를 먼저 마주해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우리가 아이의 특정 행동에 유독 불같이 화를 내거나 견디지 못하는 순간, 그 감정의 이면에는 '투사投射'라는 마음의 작용이 숨어 있습니다. 투사란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결점이나 욕망을 상대방에게 덧씌워 ‘내가 아닌 네가 그렇다’라고 믿는 무의식적 기제입니다. 융은 이를 우리 마음의 어두운 부분인 '그림자'라고 불렀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어린 시절 충분히 수용 받지 못해 억눌러왔던 열등감, 혹은 사회적 기준에 맞추느라 제거하려 했던 진짜 나의 모습이 아이의 행동을 통해 나타날 때, 부모는 까닭 모를 과도한 불편함을 느낍니다. 아이의 산만함이 싫은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무질서함이 두려운 것이고, 아이의 소심함이 미운 것이 아니라 과거 상처받았던 자신의 초라함이 투영되어 괴로운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자녀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을 의심해 보아야 하고, 부모라는 이유로 자녀를 너무 쉽게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도 검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고민할 내용은, 아이를 바꾸려는 과도한 시도는 사실 내 안의 어두움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몸부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융이 말한 '자신 안에서 바꿔야 할 것'이란 바로 아이에게 덧씌워진 나의 그림자를 거두어들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아이라는 거울에 맺힌 굴절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대신, 바라보는 내 눈의 왜곡과 맹점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상처 입은 나의 내면을 먼저 인식해야, 안아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아이와의 진정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아이를 교정하려는 손길을 잠시 멈추고 내 안의 불안을 먼저 직시할 때, 아이는 부모의 미결된 과제를 대신 짊어지는 고된 역할에서 해방되어 자기만의 빛깔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자신들 또한 부모의 미해결된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기대를 떠안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아이의 가방을 메어주며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그림자를 스스로 돌보며 성숙해 가는 뒷모습이야말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교육이자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개학의 분주함 속에서 융의 이 지팡이 같은 잠언을 한 번 읽어 보시고, 우리 마음의 교실을 먼저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나 자신은 그 교실에서 어떤 아이였는지 살피고, 그 아이를 품어 주지 않으면 부모는 아이의 그저 가혹한 훈육자가 될 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증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