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상담실에서 만나는 부모님들의 눈 속에는 본인의 삶보다 자녀의 미래가 더 선명하게 박혀 있음을 봅니다. "나는 못 배웠어도 내 자식은", "나는 고생했어도 내 아이는"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숭고한 희생의 언어로 통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의 거장 카를 융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쏟는 그 지극한 정성 속에, 혹시 내가 끝내 피워내지 못한 '살지 못한 삶'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융은 부모가 스스로 실현하지 못한 욕망이나 재능, 혹은 차마 선택하지 못한 삶의 경로가 자녀에게 가장 강력한 심리적 압박이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공부나 성공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내가 어렸을 때 친구가 없어서 괴로웠으니 내 아이는 사회성이 좋아야 해’라는 집착으로 아이의 인성과 사회성을 타박합니다. ‘바이올린 배우던 옆집 아이가 너무 부러웠는데, 내 아이는 모든 악기를 가르쳐야지‘라며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음악학원을 보냅니다. 친구가 없던 부모는 아마도 사회적 열등감을, 악기를 배우지 못했던 부모는 어쩌면 문화적 열등감을 가졌을 겁니다. 이런 열등감이 부모 자신이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그림자가 되었다면, 그것들은 부모의 무의식 속에 고여 있다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자녀의 삶이라는 깨끗한 도화지 위로 번져나갑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분투하지만, 정작 그 목표가 자신의 것인지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정체성의 부재를 겪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리 만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실상 자녀에게 부모의 미완성 과제를 대신 수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삶에 불만족하고 그 결여를 자녀를 통해 채우려 할 때, 아이는 부모의 삶을 대신 사느라 정작 '자기 자신'으로 태어날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을 때, 그 욕망은 자녀에게 상속되어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역설적이게도 자녀를 향한 집착의 시선을 거두어 자기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가장 큰 치유의 시작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고, 묻어두었던 꿈을 조금씩이라도 실현하며, 자신의 삶을 한 인간으로서 오롯이 즐길 때 아이는 비로소 부모의 등 뒤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부모의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으로 서 있을 때, 아이 또한 부모의 대역 스턴트맨이 아닌 자기 인생의 주연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내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이의 손을 빌려 나의 '살지 못한 삶'을 보상받으려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정직해질 때, 비로소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진정으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많은 분이 이미 이런 경험을 거치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