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런 농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에는 두 종류의 인간만 있다. 나보다 빨리 달리면 미친놈, 나보다 늦게 달리면 멍청한 놈!” 부끄럽지만, 저도 고속도로를 운전하면서 다른 운전자들을 종종 이렇게 욕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인생의 운전자입니다. 목적지도, 차량의 성능(능력)도, 운전의 숙련도(경험)도 저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심리적 마법에 걸리곤 합니다. 내가 달리는 속도가 세상의 유일한 기준이자 정의가 되는 마법입니다. 나보다 빨리 달리는 차를 보면 '제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이라며 혀를 차고, 나보다 늦게 가는 차를 보면 '답답하고 멍청한 사람'이라며 경적을 울려댑니다. 오로지 나의 속도만이 가장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저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도로 위의 운전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카를 융은 "누군가가 이해되지 않으면, 우리는 곧바로 그를 바보라 부른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타인의 삶이 나의 이해력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판단하는지, 상대를 폄하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누군가의 침묵이 깊어질 때 우리는 그를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누군가의 열정이 뜨거울 때 우리는 그를 '유난스러운 사람'이라 부릅니다.
내 마음의 잣대에 상대의 행동이 딱 들어맞지 않는 순간, 그 '다름'은 곧장 '틀림'이 됩니다. 상대를 '바보'로 규정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보다 우월하고 안전한 존재가 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자기중심적 투사는 우리 내면의 불안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입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논리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불편함을 줍니다. 이때 상대를 '바보'나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리면, 더 이상 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게 됩니다.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나의 무지를 정당화하고, 자신을 비겁한 평화에 고립시킵니다. 이해되지 않는 타자를 마주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의 경적이 아니라, 내 프레임의 한계를 인정하는 진정한 겸손이라는 성숙한 태도입니다.
누군가 나보다 늦게 간다면 그는 어린 자녀와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보다 빨리 간다면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러 가는 긴박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그를 어리석다 치부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융의 조언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상대를 바보라고 부르는 그 순간이 바로 나의 이해력이 한계에 부딪힌 지점이며, 내가 가진 잣대가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고속도로 위에서 나란히 달리는 차들을 보며 그들 각자의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듯, 타인의 삶 또한 그 나름의 치열한 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잣대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타자의 자리를 비워둘 때, 비로소 인생이라는 긴 여정은 비난의 소음 대신 공존의 평온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이 사실은 나의 편협함을 가르쳐주러 온 스승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