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계엄이 선포되던 순간, 각자가 느낀 것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공포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혼란이었습니다. 그 반응의 차이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아닙니다. 각자가 몸 안에 저장해 온 역사의 차이입니다. 정신분석에는 세대 간 전달되는 트라우마에 관한 오랜 연구가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도 몸에 각인됩니다. 역사는 책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몸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보고 우리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한 커피 기업의 '탱크데이' 마케팅 앞에서 어떤 이는 즉각적인 분노를 느꼈고, 어떤 이는 그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 반응 모두 각자가 몸으로 저장해 온 역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분노도 핏속의 역사이고, 무감각도 핏속의 역사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왜 이렇게 다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6월 3일, 우리는 투표소에 섰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인 곳도 있었고, 전혀 뜻밖인 곳도 있었습니다. 어떤 결과든 그것이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19세기 영국의 통계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은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을 발표했습니다. 시골 장터에서 군중이 소 한 마리의 무게를 각자 추정하게 했는데, 어떤 사람은 100킬로그램, 어떤 사람은 300킬로그램으로 짐작했습니다. 중구난방이었죠.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추정값의 평균이 실제 소의 무게와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740여 명이 써낸 소 한 마리의 무게 중간값은 실제 소 무게와 1파운드밖에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은 틀렸지만, 모이면 맞았습니다. 이것이 군중의 지혜이며, 집단지성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물론 다른 다양한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정보와 편향을 공유하고 있을 때 발생하는 ‘동질성의 오류’라는 결과도 발생합니다.)
민주주의의 투표도 그런 것인지 모릅니다. 각 개인은 불완전한 정보와 각자의 핏속 역사를 가지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 판단들이 모여 하나의 숫자가 됩니다. 그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평균값, 즉 민의民意는 그 순간 그 집단이 가진 집합적 인식의 정직한 반영입니다. 어쩌면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융의 집단무의식에 대해 이런 말들을 합니다. "군중의 집단무의식이 표면에 떠오를 때, 그것은 개인의 의식이 결코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민의는 이성의 산물이기 이전에, 집단의 무의식이 집약된 신호입니다. 역사는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선형입니다. 후퇴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고, 전진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 나선은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6월 3일의 결과 역시 그 나선 위의 한 점입니다. 기쁨이든 분노든 허탈함이든, 오늘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감정은 몸이 역사에 반응하는 방식이며, 그것이 무엇이든 다음 세대에게 전달될 또 하나의 핏속 역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책으로만 읽는 사람은 역사를 반복합니다. 역사를 몸으로 아는 사람이, 그리고 서로 다른 몸의 기억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미래를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