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프로그램. 그건 우리가 스스로 설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심어주었고 사회가 요구했으며 생존 본능이 각인시킨 코드였습니다. '인정받을 것', '성취할 것', '유능해 보일 것', '흔들리지 말 것'. 우리는 그 코드가 시키는 대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이 길이 애초에 내가 원한 길이었는지 알 수 없어집니다. 그것이 삶의 오후가 시작되는 신호입니다.
융은 이 전환이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채로 오후의 문턱을 넘는다고, 더 나쁜 것은 오전을 가능하게 했던 그 진리와 이상이 오후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착각을 품은 채로 그 정점을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오전에 위대했던 것이 저녁에는 보잘것없어지고, 오전에는 진실이었던 것이 저녁에는 거짓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늦게, 혹은 끝내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삶의 중반을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지금껏 당신을 세상과 연결해 주었던 얼굴, 즉 페르소나가 조금씩 낡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직업인으로서의 얼굴', '흔들리지 않는 부모로서의 얼굴', '언제나 강인한 사람으로서의 얼굴'. 그 얼굴들은 오전에 꼭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오후의 햇살 아래서 그것들은 점점 무거워집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던 결핍과 말하지 못했던 슬픔들, 억눌렀던 욕망들. 융은 이것을 그림자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더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남성 안의 여성적 원리, 여성 안의 남성적 원리인 아니마와 아니무스까지. 오전의 삶에서 우리가 억압했거나 외면했던 내면의 타자입니다.
삶의 오후가 요청하는 것은 바로 이들과의 접촉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를 증명하려는 에너지가 아닌 안을 향한 에너지. 외부 인정을 향한 질주가 아닌 내 안의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그것은 퇴보가 아닙니다.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삶의 에너지도 이제 다른 방향으로 흘러야 할 시간이 옵니다. 동쪽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등 뒤, 서쪽으로 지는 해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오후의 삶에는 전수傳授와 공유의 과제가 기다립니다. 오전에 힘겹게 배우고, 넘어지며 상처를 통해 알게 된 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일입니다. 융의 언어로는 개성화의 완성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개인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닫혀있지 않습니다.
하지 이후의 여름은 더 뜨겁습니다. 빛이 짧아지는 것은 느끼지 못하는데, 열기는 더 오래 남습니다. 삶의 오후도 그러합니다. 내 삶은 훨씬 더 뜨겁고 열정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이미 삶의 해는 기울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오전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의 오후는 어디쯤 와 있습니까. 한해의 절반은 어땠습니까? 남은 한 해의 절반은 어떻게 보낼 생각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