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이상하게도 관계의 상처가 더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오래전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거나,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왜 나는 늘 이런 사람과 얽히는가 하는 물음이 머리를 가득 채웁니다. 융은 그 물음의 답이 바깥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당신 안에 있었습니다.
카를 융은 아니마anima 는 남성의 내면에 있는 여성적 원리입니다. 아니무스animus 는 여성의 내면에 있는 남성적 원리입니다. 그런데 융을 제법 공부한 분 중에서도 이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남성의 연인을 가리켜 "저 여자가 그 남자의 아니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연인은 아니마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그 남성의 아니마가 투영된 대상입니다. 아니마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남성의 정신 깊은 곳에 있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바깥의 누군가에게 그것을 덮어씌웁니다.
투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연인뿐만이 아닙니다. 이유 없이 미워지는 사람, 만나면 이상하게 위축되는 사람,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자극받는 상대는 모두 우리의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투영된 대상일 수 있습니다. 감정이 유난히 강하게 반응하는 곳에 투영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십 대 중반의 한 남성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 만난 여성에게 "세상에서 가장 이해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숭배에 가까운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같은 여성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성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남성의 아니마가 극을 바꾼 것입니다. 이상화했던 것이 실망으로 뒤집힌 것입니다. 성녀가 천박함으로, 요정이 마녀로 바뀌는 것은 융의 말한 양극성이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또 다른 예입니다.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관계를 맺는 남성들이 늘 "처음에는 강하고 믿음직해 보이다가, 나중에는 고집불통에 무감각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성들이 그런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녀의 아니무스가 처음에는 강인한 이상을 투영했다가, 시간이 지나며 실망으로 돌아선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자신의 내면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융은 분석의 목표를 투영의 회수라고 했습니다. 바깥에 내던진 자신의 일부를 다시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일. 이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타인이 타인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 자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강하게 끌리거나, 강하게 거부감을 느낄 때, 잠시 멈추어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지금 저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안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가. 그 물음이 당신을 타인으로부터 당신 자신에게로 데려다 줄 수도 있습니다.
당분간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야기를 몇 번 더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