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없이, 오직 아버지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성의 이성과 판단이 어디서 오는지를 이 신화로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카를 융은 여성의 내면에 아니무스라는 남성적 심리 구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들이나 어떤 종류의 최고 권위자들의 집회처럼, 논박할 수 없는 이성적인 단호한 판단을 내린다"라고 했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순간 내면에서 먼저 오는 그 목소리, 너무나 단호하여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그 목소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처럼 들리지만 어딘가 낯설기도 낯익기도 합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아니무스는 흔히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해 형태를 특정해 나갑니다. 여성의 고집이 아버지를 닮아 있거나, 과제 앞에서 느끼는 불안의 방식이 아버지가 압박을 다루던 방식과 겹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닮음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했는가가 더 결정적입니다.
같은 아버지 아래 자란 자매가 전혀 다른 내면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의 권위에서 든든한 기준을 배웠고, 다른 사람은 같은 권위에서 자신을 억누르는 억압을 배웠습니다. 아니무스는 아버지를 복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그 의미를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와 그 관계의 친밀감의 종류가 딸의 내면에 오래 남습니다.
두 번째 신화를 예시로 들어 보겠습니다. 페르세포네는 꽃을 꺾으러 나갔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 세계로 끌려갔습니다. 어머니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온 땅을 헤맸고, 그 사이 대지는 황폐해졌습니다.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에서 석류 씨앗을 먹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융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무의식 속으로의 깊은 하강이었고, 그 안에서 만난 것들과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지하의 왕과 함께 살아야 했던 페르세포네처럼, 많은 여성이 자신도 모르게 내면의 아니무스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아니무스가 하데스처럼 어둡고 차가운 판결을 내릴 때,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내면의 왕의 목소리인지를 구분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어떤 여성의 머릿속 아버지들은 따뜻한 조언자들이고, 어떤 여성의 머릿속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부족함을 지적하는 심판관들입니다. 그 차이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느냐보다, 그 아버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느냐에서 옵니다. 아테나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채 태어났듯, 우리 안의 판단도 이미 어떤 형태를 갖추고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융은 아니무스를 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의식화될 때, 즉 내 안에서 그 목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챌 때, 심판관은 조언자로 바뀔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와 지상 세계를 오가는 존재가 되었듯, 아니무스를 아는 여성은 내면의 깊은 곳과 일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도 아버지들이 모여 있습니까? 그들이 오늘 당신에게 무슨 판결을 내리고 있는지, 한 번쯤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 판결이 언젠가 바뀌게 된다면 아버지가 바뀌어서가 아닙니다. 그 아버지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