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란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입니다. 인색함, 질투, 비겁함, 허영 등등, 우리는 그것들이 내 안에 없는 것마냥 행동합니다. 그래 놓고 그것을 타인에게서 발견합니다. 유난히 미운 사람, 이유 없이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내 그림자의 거울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일은 아프지만, 사실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조금만 정직해지면 됩니다. 그래서 수련작입니다.
그런데 융은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림자보다 더 깊은 곳, 의식에서 더 먼 곳에 또 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남성 안의 여성적 원리인 아니마, 여성 안의 남성적 원리인 아니무스. 그림자가 내가 부정한 나라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나입니다. 강해야 했기에 접어둔 부드러움, 이성적이어야 했기에 묻어둔 느낌, 책임져야 했기에 미뤄둔 갈망. 삶의 오전 내내 우리는 그것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고, 그 배움이 성실할수록 그것들은 더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정신분석 작업에서 중장년 남성들이 보이는 독특한 현상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접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어떤 이는 공포스럽다고까지 말합니다. 흡사 귀신이 살고 있는 어둡고 음습한 동굴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분도 있습니다. 평생 숫자와 논리로 세상을 상대해 온 사람이, 정작 자기 마음 앞에서는 동굴 입구에 선 아이가 됩니다. 그 동굴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있는지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사십 년 넘게 잠가둔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아직 살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은 한 장년의 남성이 있습니다. 분석 중에 그는 어릴 적 경험한 마음의 상처 하나를 기억해 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조직을 이끌고 위기를 돌파하며 살아온 그가, 그 오래된 기억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감정을 처리하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회사의 위기라면 대응 매뉴얼이 있지만, 일곱 살의 슬픔에는 매뉴얼이 없었습니다. 그의 오전의 프로그램에는 그 항목이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빈틈없이 살아온 중년 남성이 전혀 뜻밖의 여성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 사람이 왜, 하필 그 여성에게 빠졌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융의 눈으로 보면 그 여성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사십 년간 발언권을 얻지 못한 그의 아니마가, 마침 그 여성의 얼굴을 빌려 나타난 것입니다.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은 사실 그 여성이 아니라, 자신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자기 자신의 절반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뜨겁지만 공허하고, 상대를 바꿔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바깥의 여성은 계속 바뀌어도 안의 아니마는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 대면이 완성작일까요. 그림자는 인정하면 되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인정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살아내야 합니다. 동굴 앞의 두려움을 견디며 들어가야 하고, 처리하지 못한 일곱 살의 감정에 이제라도 이름을 붙여야 하고, 바깥의 여성에게 걸어둔 투사를 거두어 자기 안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수련작은 기술의 증명이지만 완성작은 존재의 증명입니다. 그래서 이 작업은 대체로 삶의 오후에야 시작됩니다. 오전에는 그럴 여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융은 통합된 아니마가 남성에게 자신의 감정과 관계 맺는 능력이 되고, 통합된 아니무스가 여성에게 성찰과 자기 인식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동굴 속의 귀신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평생 나를 기다려온 나의 가장 깊은 잠재력이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요즘, 낯선 감정이 자꾸 올라와 당황스러우십니까.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이 걱정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너지는 징후가 아니라, 당신의 완성작이 될 작품에 착수하라는 신호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