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강박 #쾌락원칙 #정신의질서 안녕하세요, 김승환입니다. 돌아보니 20대 후반 첫 직장에 취업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참 밀도 높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담사로 직업을 전환한 후에도 일과 배움으로 바쁜 날들이 계속 이어졌고요. 문득 돌아보면 "바쁘다"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재밌는 건 말로는 "쉬고 싶다"면서 실제로는 바쁜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어쩌면 일이 없는 텅 빈 시간을 제가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이후 '평온한 시간을 바쁨으로 채우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구독자님은 어떠신가요? 내가 원하는 것과, 나의 실제 선택 사이의 간극으로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가 작은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주 휴맨레터는 한 주 쉬어갑니다. 8월 첫째 주에 찾아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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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질서 episode 7 #왜 우리는 고통을 반복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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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질서 7회〉 방송에서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를 다룬 세번 째 시간으로 '쾌락'과 '흥분', '현실 원칙'의 개념을 통해 인간 정신에 숨겨진 깊은 미스터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 원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즐거움이나 자극이 아니라, 정신적 긴장(흥분)이 이완되는 과정입니다. 즉, 평온하고 이완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의 원칙'에 가깝습니다. 충동이나 불안 같은 에너지가 해소될 때 느끼는 안도감과 평정이 바로 정신분석이 말하는 쾌락의 본질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배가 부르면 그저 쉬는 포식자 동물처럼 쾌락 원칙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명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아Ego를 작동시키며 ‘현실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당장의 쾌락을 미루거나(만족 지연), 고통을 참아내기도(불쾌감수) 합니다. 이렇게 우회와 타협을 거치며 더 깊은 차원의 안정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큰 질문이 찾아옵니다. 우리 정신이 오직 평온함(쾌락)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왜 고통을 반복할까라는 질문이지요. 예를 들어, 한국 남성들 중에 제대한 지 20년이 지나서도 '재입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반복되는 외상 장면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무의식의 '반복'은 단순한 쾌락 원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의 '실패 놀이Fort-Da game'나 고통스러운 기억의 반복을 보며, 쾌락 원칙 너머에 또 다른 작동 방식이 있음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에서 반복 되는 고통을 이해하고,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쾌락 원칙 너머의 무의식적 이면을 탐색해 보아야 합니다. 원치 않는 관계 패턴이나 고통스러운 선택을 반복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데 이번 방송이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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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피드백을 통해 남겨주신 '질문'을 엄선하여 응답하는 시간! 무엇이든 '물어보세휴' 입니다. 그동안 어떤 질문들이 있었는지 한번 볼까요? 😊
Q) "40대 후반인데요, 오전에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 같습니다. 작년에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하고, 올해부터 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을 시작했거든요. 하고싶은 일이었으나 (돈은 아주 조금 버는)이 일도 만만찮게 힘들지만 잘하고 싶은 열정이 있어요. 이처럼 살지 못했던 삶을 살아내면 이에 대한 문제가 사라지나요? 아니면 살아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을 들여다봐야 하나요?" - 별꽃 님
↳RE: 좋은 질문이고, 별꽃 님의 용기부터 인정하고 싶습니다. 20년 넘은 직장을 정리하고 원하던 일로 옮겨간 것 자체가 이미 오전의 프로그램을 멈춘 행동입니다.
다만, 융이 말한 오후로의 전환은 활동의 교체가 아니라 에너지 방향의 전환입니다. 오전에는 에너지가 세상에 나를 증명하는 쪽으로 흘렀습니다.
오후에는 그 에너지가 안으로,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 쪽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새 일을 시작하는 것 자체는 여전히 바깥을 향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잘하고 싶은 열정"이라는 표현이 단서인데, 그 열정이 여전히 잘함과 인정을 향하고 있다면 오전의 문법이 새 옷을 입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던 일을 실현하는 것과 삶의 오후로 들어서는 것은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전자는 후자의 좋은 조건이 되어줄 수는 있지만, 자동으로 완성해주지는 않습니다. 이 일이 힘든 순간, 그 힘듦을 견디는 이유가 여전히 잘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그 일과의 접촉과 몰입 자체 때문인지를 스스로 물어보시길 권합니다. 후자의 비중이 커질수록 진짜 오후로 들어선 것입니다. (이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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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성을 볼 때 아니무스가 처음에는 강인한 이상을 투영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으로 돌아섰다는 말이, 대상관계에서 이상적 자기대상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되는 걸까요? '한순간 사랑에 빠졌다가 이내 실망'하는 것을 반복하는 패턴을 반복하는 일반이나 내담자에게 어떻게 알아차리고,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 Grassdragon 님
↳RE: 이렇게 인간 삶의 중요한 주제에 대해 짧게 답을 드리는 것은 항상 쉽지 않습니다. 큰 주제에 짧은 답변이라는 형식이 자칫 그 사람의 삶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로 나눠 답하겠습니다.
부모 이미지(이마고)와의 융합 과정에서 최적의 좌절이 발생하고, 그 실망을 통해 이상화되었던 부모의 기능이 아이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된다는 코헛의 자기대상 이론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마·아니무스 투사는 구조가 다릅니다. 이것은 자기대상 기능의 연장이 아니라, 무의식 안에 이미 완성된 원형적 이마고가 바깥 대상에게 옮겨붙는 것입니다. 코헛의 도식에서 실망이 성장의 통로라면, 융의 이론에서 실망은 투사가 대상과 충돌해서 깨지는 사건입니다. 자기대상은 자신의 부모라는 특정 대상에 관한 것이고, 아니마·아니무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원형, 즉 집단무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질문하신 비슷한 연애 실패의 반복은 그 패턴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실망의 순간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 지점부터는 그 이상적 이미지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결핍과 맞닿아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이야기입니다. 원하시는 구체적인 해결 방법은 지면의 제약도 있고, 구체성이란 개인성을 담보로 한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에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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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꽃 님 "요즘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를 읽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레터가 참 잘 읽혀요. 이해와 성찰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겨울 님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읽어 내려가며 한 가지 함께 나누고 싶은 관점이 있어 조심스레 의견을 보탭니다. 작성해 주신 내용 중 '그림자는 인정하면 되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살아내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요.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림자 역시 단순히 인지하고 인정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로 삶 속에서 '살려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부영, 「분석심리학: C.G. 융의 인간심성론」94쪽) 융 학파에서는 그림자 통합 역시 단순히 머리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삶으로 체험하고 살려내야 하는 깊은 과제로 다루는 것 같아 의견을 나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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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주신 질문은 한꺼번에 모아 마지막째 주 레터에서 답변드릴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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