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 전부 투사인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무례함을 알아차리고 배려를 알아보는 일은 대개 그저 정확한 관찰입니다. 실제로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는 것도 투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융이 가리키는 것은 판단 자체라기보다, 그 판단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일부가 개입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향해 유난히 격렬한 감정이 일어나고 그 감정이 좀처럼 풀리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들러붙을 때, 우리는 한 번쯤 그 감정 자체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이성이 끊기고, 몇 년이 지나도 미움이 닳지 않으며, 별것 아닌 언행 하나에도 상대 전체를 부정하고 싶어진다면, 그 유독한 격렬함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볼 만한 신호입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나는 이 사람을 정확히 보고 있다고, 저 사람의 이기심과 오만함이 눈에 훤히 보인다고. 그러나 융이라면 그 감정 속에 내가 나에게서 보지 못한 것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해 본 적 없는 사람이 타인의 사소한 흔들림 앞에서 유난히 가혹해질 수도 있고, 자신의 공격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자기주장조차 이기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 안에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 타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때로 그 사람에게 필요 이상으로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정작 자기 안에서는 이름조차 얻지 못한 것이 특정한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만 요란하게 준동하는 셈입니다.
이 맹목과 왜곡이 무서운 것은 그러한 자각이 거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투사는 흐릿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없이 선명하고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처럼 다가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딱 보면 안다”는 확신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 확신까지도 한 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위를 숫자로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짐작임을 아는 것과, 내 안의 것을 남에게서 보면서도 그것이 내 것인 줄 모르는 것. 이 둘 사이의 거리가 바로 융이 말한 맹목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배우자의 특정한 습관 하나에 매번 걷잡을 수 없이 격분하면서도 정작 자신 안의 비슷한 면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배우자에게 실제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투사는 상대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상대의 실제 잘못과 내가 그 위에 덧씌운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실수에는 너그러우면서 유독 타인의 잘못 앞에서만 냉정을 잃는다면, 그 ‘유독함’ 자체는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왜 하필 이 지점에서 이렇게까지 반응하는가.
어떤 한 사람이나 한 집단 앞에서만 유독 감정이 격해지고 그 감정이 오래도록 닳지 않을 때, 곧바로 그것을 투사라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 번쯤 자신에게 물어볼 일입니다. 이 유독한 격렬함은 어디서 오는가. 저 사람 안에서 정말 처음 보는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던 어떤 것이, 지금 저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