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이 말년에 쓴 마지막 책 <인간과 상징>에 나오는 말입니다. 평생 인간의 무의식을 들여다본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문장치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러나 이 단순함 안에 그가 평생 부딪혔던 싸움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범주로 묶는 순간, 그 사람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말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자들은 다 그렇다, 자고로 학생은 이래야 한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이 말들은 편리합니다. 낯선 사람을 순식간에 파악한 것 같은 착각을 주고, 판단을 서두르게 해주고, 무엇보다 더 이상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게 만듭니다.
범주는 사람을 이해하는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사람에게 가는 길을 통째로 막아버리는 벽입니다. "여자는 다 그렇지"라는 말을 뱉는 순간, 눈앞의 그 여성이 오늘 아침 무슨 생각으로 눈을 떴는지, 무엇 때문에 손끝이 떨리고 있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범주라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린 세대들 앞에서 이 실수는 특히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는 "MZ들은 다들 왜 그 모양이야?"라는 말로 한 세대의 남녀를 재빨리 정리해 버립니다. 그런데 정말로 한 청년의 말을 끝까지 따라가기란 어렵습니다. “초딩들은 대책이 안 서”라고도 하지요. 그러나 한 아이가 그린 그림 하나, 아이가 만든 낱말 하나를 붙잡고 왜 그렇게 그렸는지, 왜 그 낱말을 골랐는지 물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안에는 어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오직 그 아이만의 논리와 경이로 가득한 세계가 있습니다. "MZ은 모두..., 초등학생은 원래..."라는 말 한마디가, 그 경이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난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뉴스 화면 속에서 그들은 종종 얼굴 없는 행렬로, 통계로, 숫자로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행렬 속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각자 다른 골목이 있었고, 각자 다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있었고, 손에 쥐고 나온 물건 하나에 담긴 각자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그들을 "난민"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돕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그들 각자의 세계를 지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융이 말한 실재란 이런 것입니다. 인류라는 종, 여성이라는 집단, 학생이라는 신분, 난민이라는 범주. 또, 너는 INFP 나는 ESTJ를 써서 인간을 16가지로 구획해 버리는 편리성. 이런 것들은 사고를 정리하는 데는 유용할지 몰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도 만난 적이 없는 추상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언제나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 사람의 특정한 목소리, 특정한 망설임, 특정한 상처 말입니다.
상담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울증 환자는 대개 이렇다"는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 지식이 눈앞의 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진단을 지도라고 비유한다면, 그 사람은 지도가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실제의 땅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속한 범주에서 먼저 눈을 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 하는 말, 지금 짓는 표정, 지금 고르는 단어 하나에 눈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융이 말한 유일한 실재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단 한 번뿐인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오직 한 사람, 그 사람 자신만이 살아낸 세계이고, 우리가 진심으로 만날 수 있는 것도 결국 그 하나의 세계뿐입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안에는 당신 자신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