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은 말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본 『기억, 꿈, 사상』의 첫머리에서 삶을 바로 이 뿌리줄기에 견주었습니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며 눈으로 확인하는 것들은 한 철을 사는 꽃처럼 피었다가 이내 시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삶을 정말 삶답게 하는 힘은 땅 밑에 숨어 눈에 띄지 않는 쪽에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한 시절이지만, 그 아래에는 더 오래 지속되며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뿌리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훨씬 뒤에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도 '리좀'이라는 같은 낱말을 붙들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말한 리좀은 위계도 중심도 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사유의 형태를 가리키는 개념이었습니다. 나무처럼 하나의 중심에서 가지를 뻗어가는 위계적이고 계보적인 질서에 맞서, 리좀은 어느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접속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사유의 형상을 가리켰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고전적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과도 이어집니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에서 출발해 가족과 오이디푸스의 구조 안에서 해석하는 정신분석에 맞서, 욕망을 개인의 내면에 갇힌 결핍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사회적 흐름에 끊임없이 접속하며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힘으로 보았습니다.
융의 뿌리줄기는 결이 다릅니다. 그가 이 비유에서 가리킨 것은 사유의 구조라기보다, 눈에 보이며 생겨났다 사라지는 삶과 그 아래에서 보이지 않은 채 지속되는 삶의 관계였습니다. 같은 낱말이 이렇게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새삼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융의 이 비유를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저는 겨울에 대한 생각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게 됩니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뿌리줄기 같은 생명체로 살기 위해서는 겨울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계절, 겉으로는 멈춘 듯 보이는 시간을 통과해야 봄의 저 무서운 생명력도 가능해집니다.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성과와 활동으로만 삶의 안부를 가늠하려 합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시기, 관계와 일에서 물러나 조용히 웅크리는 시기를 마치 삶이 멈춘 것처럼, 심지어 잘못된 것처럼 여기고 스스로를 다그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의 계절이야말로 뿌리가 힘을 기르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꽃이 지는 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는 마음,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다음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겨울이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고도 땅 아래 살아남는 뿌리줄기처럼, 우리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자기 삶의 계절을 존중하는 태도이며, 마음을 돌보는 일의 시작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