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많이 안다"는 것은 정보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자격증이 많다거나, 남들이 모르는 지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융이 이 문장을 썼을 때, 그는 자신의 고독이 "이른 시절의 꿈들"과 함께 시작되었고 "무의식을 파고드는 작업을 하던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고 적었습니다. 그가 말한 앎이란 삶의 진리, 존재의 본연, 고통의 본질, 인간이 유한하면서도 동시에 무언가 영원한 것과 닿아 있다는 감각, 이런 종류의 앎입니다. 이것은 배워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냄으로써 얻는 앎입니다.
이런 종류의 앎은 애초에 말로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마주해 본 사람,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다시 돌아온 사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그 상실을 통과해 낸 사람은 무언가를 압니다. 그런데 그 앎은 아직 ‘그런 시간’을 지나지 않은 사람에게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온전히 가닿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시간’입니다.
누구나 고통의 시간, 혼란과 상실의 시간을 거칩니다. 인간의 삶이 다 거기에서 거기라면 보통의 사람들은 누구나 이별, 죽음, 상실, 무기력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바로 융이 말한 ‘그런 시간’을 가집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다른 자극으로 도피하거나 애써 느끼지 않음으로, 겪어야 할 ‘그런 시간’을 유실해 버립니다.
융이 말한 ‘앎’이란 이런 경험을 온전히 겪고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여기에 융이 말한 고독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가 다른 대목에서 밝혔듯, 고독은 곁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전달할 수 없다는 데서 옵니다.
하지만, 이 고독은 사람을 피하거나 관계에서 물러나야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 고독은 사람들 한가운데 있을 때조차 함께 있는 것입니다. 융이 말한 고독한 사람은 사람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연구가 이 지점을 뒷받침합니다. 그는 링컨, 아인슈타인, 스피노자와 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들과, 자신의 시대에 실제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자기실현을 이루었다고 할 만한 이들을 골라 깊이 연구했습니다. 이들에게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환경과 문화로부터의 상대적 독립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변의 인정이나 시류에 자신의 만족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는 초연함과 사생활에 대한 필요였습니다. 이들은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훨씬 편안해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인간관계는 숫자로는 많지 않았지만, 깊이에서는 남달랐습니다. 매슬로우는 이들이 소수의 사람과만 깊은 유대를 맺는 경향이 있다고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특징들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혼자 있기를 편안해하고 관계의 폭이 좁아진 것은 고독을 목적으로 삼아 사람을 피한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마주한 결과로 남들과 나눌 수 없는 무언가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소수의 사람과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전한 잠언의 핵심은 나는 지금 내 삶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며 그것에 깃든 어떤 진실을 겪어 가고 있는가, 외면하지 않고 통과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