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뚫려 있는, 자아보다 훨씬 오래되고 훨씬 큰 어둠으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태어난 이후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꿈은 낮 동안 억압된 개인적 욕망이 위장된 형태로 흘러나오는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융은 이 그림에 큰 층 하나를 더했습니다. 인간의 정신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개인의 경험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갖추어져 있는 원형原型이라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특정한 기억이 아니라 인류가 오랜 세월 반복해 온 근원적인 패턴 즉, 어머니, 영웅, 그림자, 죽음과 재생 같은 것들이 새겨진 자리입니다. 이 원형 때문에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래된 과거와 자연과 우주라 부를 만한 것과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결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꿈입니다.
융은 인간을 본래 자연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을 그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떼어내, 본질적인 인간성을 잃은 채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진단했습니다. 낮 동안 우리는 계획하고, 분류하고, 목표를 세우고, 효율을 따집니다. 이 모든 것이 자아의식의 작업입니다. 그런데 자아의식은 본질적으로 가르고 나누는 기능입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조각조각 나누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뉜 조각들 사이에서 우리는 자연과, 근원과, 서로와 점점 멀어집니다. 밤이 되어 그 자아의 활동이 잦아들 때, 무의식은 낮 동안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려 합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잠시, 가르고 나누기 이전의 더 온전하고 오래된 존재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흔히 꿈을 그저 낮의 찌꺼기나 무의미한 잡음 또는 개꿈이거나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 계시로 여기는데, 융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커다란 오해이며 상실입니다. 원형과의 연결이 끊어진 채 오직 자아의 계산만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무리 성공적으로 보여도 어딘가 메마릅니다. 반대로 이따금 꿈이 유난히 강렬하게,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전하려는 듯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꿈 앞에서는 이것이 그저 낮의 잔여물이 아니라는 것을, 훨씬 깊은 곳에서 올라온 무언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융은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프로이트와 융이 갈라선 결정적인 순간에도 바로 이 지점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융이 꾸었던 어떤 꿈을 두고 프로이트는 자신의 방식대로, 욕망과 억압의 언어로 해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융은 그 해석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느끼기에 그 꿈은 개인사로 환원될 수 없는, 훨씬 크고 오래된 무언가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결국 이 지점에서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섰습니다. 프로이트에게 꿈이 개인의 방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다면, 융에게 꿈은 그 방의 벽을 뚫고 우주의 밤으로 이어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지난밤 혹시 유난히 생생한 꿈을 꾸었다면, 그것을 너무 성급히 해석하려 들기보다 잠시 그 문 앞에 서 보시길 권합니다. 그 문 너머에는 당신 개인의 사연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것, 당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당신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어떤 어둠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둠에서 왔고, 매일 밤 잠시 그리로 돌아갑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낮 동안 조각나 있던 우리는 잠시나마 다시 온전해집니다.
📍다음 주를 끝으로 지난 1년간 연재한 융의 잠언을 마칩니다. 미리 작별을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