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s no coming to consciousness without pain.”
우리 존재를 뒤흔들어 깨우는 순간은 흔히 고통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과 평화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융은 오히려 고통이야말로 참된 자각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라고 보았습니다. 고통은 ‘깨닫는 과정’의 징후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피하거나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융의 관점에서 고통은 단순히 ‘불편한 감정’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문턱입니다. 예를 들어 관계에서 반복되는 상처, 불안, 분노는 우리 안에 아직 직면하지 못한 무의식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불편하기에 우리는 회피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시작해 보아야 합니다. 이 질문은 고통의 내용을 바꾸고, 내 안의 지혜와 연결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이 주는 통증에 시달리기만 합니다. 그래서 진통제를 찾습니다. 그것은 종종 술이나, 수다나, 쇼핑이나, 자극적인 음식이나, 예능 프로 같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고통을 외면하면 무의식은 더 큰 신호로 우리를 흔듭니다. 관계의 균열로, 혹은 삶의 공허함이나 심지어 몸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반대로 고통을 통해 삶의 진실을 ‘이해하려는 용기’를 낼 때, 무의식의 그림자는 우리를 괴롭히는 적이 아니라, 성장을 촉진하는 동력이 됩니다.
살면서 겪게 될 고통이 참된 자각을 위한 연구과제라고 말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태도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 그 자체가 고통을 낮추는 강한 효과가 있습니다.
고통은 흡사 미운 자식과 같습니다. 미운 짓을 하니까 꼴도 보고 싶지 않지만, 이 아이가 이렇게 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미운 자식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미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아이가 하는 행동이 객관적으로 보이고 더 이상 미운 마음을 발동시키지 않습니다. 즉, 고통을 탐구하려는 그 태도 자체가 주는 통증의 경감 효과가 있습니다.
결국 이런 태도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 이 터널을 통과하면 조금은 다른 삶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물론 이 고통을 통과한다고 해서 바뀐 세상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좀 더 단단해지고 여유있고 깊어진 자기 자신이 되어 있을 겁니다.
혹시 어떤 일들로 인해 크고 작은 고통을 겪고 있다면 치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치유란 고통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을 의미 있게 바라보는 태도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삶의 고통을 단순한 불행이 아닌, 나를 깨우는 ‘영혼의 알람’으로 바라보는 순간, 치유는 이미 시작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 그 고통을 향해 조용히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말 ‘힘들다’에 깃든 지혜도 생각해 봅시다. ‘힘 들다’는 힘이 ‘들어 온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힘든 일을 겪어야 힘이 들어와서 힘이 생기는 것이죠. 고통을 한껏 이용해 봅시다. 한 주 동안 자기 자신과 친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