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옳은가, 그른가’를 기준으로 자신과 세상을 재단합니다. 이렇게 판단하며 살아야 질서가 유지되고, 삶이 통제 가능한 듯 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카를 융은 우리의 마음은 사실 그런 도덕적 축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진자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오간다고. 상식과 비상식, 또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라고 확장해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 내면이 언제나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가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 설명되지 않는 슬픔, 이유 없는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틀렸다”, “비정상이다”라고 판단하며 밀어내려 합니다. 하지만 융은 바로 그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혼란’ 속에 무의식의 목소리, 삶의 진리가 숨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너무 빠르게 판단할 때, 마음의 진자는 거의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 감정은 나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식의 규정은 마음을 한쪽에 고정시켜 버립니다. 그 상태에서는 성장도, 치유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자가 멈춘 시계가 시간을 잴 수 없듯, 마음의 움직임이 멈추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다운 삶은 내 안의 모든 면모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순간에 있지요. 슬픔, 분노, 혼란조차 내 안의 한 부분으로 인정할 때, 마음의 진자는 다시 부드럽게 흔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층은 종종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꿈, 예감, 상징, 혹은 이유 없는 감정으로. 삶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융의 통찰은 그 불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진자의 움직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성의 세계에만 머무르면 우리는 굳어버리고, 무의미의 세계에만 빠지면 길을 잃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건강이란 ‘한쪽에 고정되지 않는 유연함’, 즉 의식과 무의식, 의미와 혼돈을 모두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삶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의미와 무의미의 진동은 곧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기쁨이 지나가면 허무가 찾아오고, 확신 뒤에는 의심이 따라오죠. 그런 리듬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의 마음이 혼란스럽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진동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당신 내면의 세계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 흔들림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오늘을 견디는 것, 그것이 융이 말한 ‘정신의 진자’가 만들어내는 치유의 리듬입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잠시 머물러 봅시다. 설명할 수 없지만 진하게 느껴지는 마음의 울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내면의 진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 진동을 억누르지 말고 지켜보는 순간, 혼돈은 차츰 의미로 변하고, 무의미 속에서 새로운 통찰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은 옳고 그름이 아닌, 이해와 모호함 사이를 오가며 성장한다. 그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